인도-포르투갈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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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20세기 이전
2.2. 20세기
2.3. 21세기
3. 문화 교류
4. 관련 기사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인도포르투갈의 관계. 역사적으로 고아다만디우 등 인도의 일부 해안 도시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다.


2. 역사적 관계[편집]



2.1. 20세기 이전[편집]


대항해시대부터 포르투갈 왕국은 인도의 서해안에 위치한 도시들을 정복했다. 특히, 고아다만디우 등 인도 서해안에 위치한 도시들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다.[1] 포르투갈은 고아와 다만디우 등을 점령 및 지배하면서 천주교 등을 전파하기도 했다.

이베리아 연합때에 스페인 왕국이 포르투갈의 국왕도 겸하면서 일시적으로 고아와 다만디우 등도 스페인령이 잠시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베리아 연합은 근현대적 국가간 합병이 아니라 엄연히 중근세식 동군연합, 법적 실체로서 포르투갈 국가도 '이웃나라 왕이 포르투갈왕도 겸할 뿐인' 형태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행정 통치 실무도 당시 포르투갈 제국의 주력 시장이었던 인도양-아시아쪽은 포르투갈 토착 엘리트들이 맹렬하게 사수하며 한번도 스페인인 관료, 상인들이 진출하도록 허락하지도 않았다.

(대항해시대 당시) 전체적으로 보아 현지(인도양 일대)에서 활동했던 포르투갈인은 단지 1만 2000명에서 1만 4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부족한 인구는 현지 토착민의 상류층 가운데 세례를 받은 여성들과 결혼해 충원했다. 정식 포르투갈 공동체는 본국의 도시를 모델로 하는 자치 행정권을 보유했다. 1497년에서 1700년까지 총 1149척의 선박이 72만 1705톤이 되는 물자와 33만 354명을 싣고 리스본 항구를 떠났으며, 59만 8390톤(83.6%)의 물자와 29만 2227명(88.5%)을 실은 960척의 선박이 아시아에 도착했다. 역방향으로는 53만 7215톤의 물자와 19만 3937명을 실은 781척의 선박이 이동했다. 그중 44만 1695톤(85%)과 16만 4012명(85.6%)이 리스본에 도착했다.

하버트 C.H. 베크 세계사 /1350~1750 3 남아시아와 인도양


포르투갈은 기존의 인도 힌두교도나 무슬림들만 가톨릭으로 개종시킨 것이 아닌 케랄라 지역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믿는 이른바 성 도마 기독교인들과 서로 이단으로 취급하고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였는데, 그 결과 케랄라의 인도 기독교인들은 교황수위권은 인정하되 고대 아람어 전례를 유지하는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등등의 교파를 믿게 되었다. 대항해시대 당시 인력 부족 문제가 심각하던 포르투갈은 식민지 현지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족족 군인이나 선원으로 징병하여 다른 식민지를 정복하거나 유지하는 인력으로 활용하였다. 포르투갈의 말라카 정복이나 스리랑카 칸디 왕국과의 전쟁에서 유럽계 외에도 많은 남인도계 군인들이 활약했는데 이들은 라스카린[2]이라고 불렸다.

이 외에도 포르투갈인들은 모잠비크와 탄자니아 등지에서 징집한 흑인 노예 병사들도 인도로 데려왔는데 인도인/스리랑카인들은 이들을 판매한 포르투갈인들이 부른 이름 그대로 카피르(Kaffir)[3]라고 불렀다.[4]

포르투갈 왕국은 서서히 지나면서 쇠퇴했고 포르투갈이 차지하던 지역들도 영국, 네덜란드 왕국 등이 일부를 차지하면서 포르투갈령 지역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포르투갈령 봄베이는 포르투갈이 영국에게 지참금 명목으로 할양하였다 한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포르투갈령 식민지는 줄어들었고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던 브라질도 독립하면서 포르투갈령 지역은 아프리카, 인도의 고아와 다만디우, 동티모르, 마카오 지역만 남게 되었다.


2.2. 20세기[편집]


20세기에 들어서자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지역에서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1948년에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인도도 독립한 뒤에 처음에 포르투갈로부터 영토 반환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포르투갈측이 무시하자 인도는 포르투갈과 잠시 단교를 선언했다. 그리고 포르투갈측에 선전포고를 하고 포르투갈과 전쟁을 벌이면서 고아와 다만디우를 되찾았다. 이에 포르투갈은 반발해 나토측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도리어 포르투갈만 비난받았다. 나중에 포르투갈은 고아와 다만디우 지역을 인도의 영토로 인정하게 되었다.


2.3. 21세기[편집]


현재에 들어서면서 인도와 포르투갈은 역사적으로는 사이가 좋지 못한 편이다. 다만, 고아와 다만디우는 포르투갈의 지배와 영향으로 포르투갈어크리올어가 일부 쓰인다. 포르투갈어만 잘 알아도 관광에는 크게 어렵지 않다. 그리고 고아와 다만디우는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많이 있고 이름 또한 포르투갈식이다. 하지만 인도 정부는 고아와 다만디우 지역에 남아있는 포르투갈식 인명이나 지명을 인도식으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고 고아와 다만디우 지역도 힌두교 신자가 늘어나고 있다.

포르투갈 내에는 인도계 포르투갈인들이 꽤 많이 거주하고 있다. 포르투갈의 총리인 안토니우 코스타 총리가 인도계 포르투갈인이다. 과거 포르투갈에 거주하는 인도인 공산주의자들은 카네이션 혁명을 지원했다.

현재 양국 사이의 교류가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포르투갈과 인도는 교류가 많은 모잠비크와의 중개 무역으로 포르투갈-모잠비크 관계 또한 인도로 인해 많이 개선되었다.

인도 고아주에서 호날두의 동상이 세워지자 논란이 일어났다.#


3. 문화 교류[편집]


포르투갈인들은 신대륙에서 고추, 감자 그리고 토마토를 가져왔는데 고추와 토마토는 인도 요리 레시피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감자는 척박한 데칸 고원 일대의 농업 생산력을 극대화시켰다.

포르투갈인들의 가톨릭 선교 결과 고아의 콘칸인 중 일부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4. 관련 기사[편집]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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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무굴 제국 등은 서해안 지역의 도시들이 포르투갈의 공격과 점령을 받으면서 오스만 제국과 협력하면서 포르투갈을 견제하고 있었다.[2] 아랍어로 경비병이나 파수꾼을 지칭하는 명사 중 하나인 "아스카르(عسكر)"에서 기원한 명칭이다.[3] 원래 동아프리카의 아랍 노예상인들이 비무슬림 흑인들을 무시하며 부르던 혐칭이다.[4] 아랍인들이 데려온 흑인들은 사이디라고 칭했다.[5]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어서 포르투갈의 영향이 남아 있다.